어릴 적 부모를 잃고 후견인 이모부(조진웅)의 엄격한 보호 아래 살아가는 귀족 아가씨(김민희).
그녀에게 백작이 추천한 새로운 하녀가 찾아온다.
매일 이모부의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것이 일상의 전부인 외로운 아가씨는
순박해 보이는 하녀에게 조금씩 의지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하녀의 정체는 유명한 여도둑의 딸로, 장물아비 손에서 자란 소매치기 고아 소녀 숙희(김태리).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될 아가씨를 유혹하여 돈을 가로채겠다는 사기꾼 백작(하정우)의 제안을 받고
아가씨가 백작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하녀가 된 것.
드디어 백작이 등장하고, 백작과 숙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가씨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하는데…
돈과 마음을 뺏기 위해 서로 속고 속이는
매혹적인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긍정적인 리뷰(Fresh)
반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는 사라 워터스의 레즈비언 소설 <핑거스미스>의 각색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영화는 박찬욱 감독의 지난 작품처럼 블랙 코미디와 화려한 예술적 연출에 영혼을 살찌우는 따뜻함과 연민을 결합시켰다. 박찬욱 감독의 모든 전작과 사라워터스의 작품을 열렬히 좋아하는 팬으로서, 2014년 박찬욱이 <핑거스미스>를 각색한다고 들었을 때, 나는 너무 흥분해서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데뷔할 때까지 매달 구글을 검색했고, 매주 구글링을 했었다. 이 리뷰에는 객관적인 척을 할 수 없다.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 영화로 내 마음은 너무 들떴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주 미국에서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영화가 나를 실망시킬까 봐 걱정했다. 칸 영화제에서 첫번째 평가가 나왔을 때, '레즈비언 에로 스릴러'라는 문구가 꽤 자주 사용 돼서 혹시나 이 영화가 소설의 퀴어 캐릭터만 착취한 것이 아닌지 걱정했다. 모든 가능한 실망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단단히 굳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하녀>에서 숙희(김태리)는 돈 많은 히데코 여사(김민희)를 유혹하고 히데코와 결혼하려는 사기꾼(하정우)의 계략에 말려드는 젊은 소매치기이다. 결혼식이 끝난 후, 사기꾼은 히데코의 재산을 가지고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낼 계획이다. 숙희가 이 사건에서 맡은 역할은 고귀한 여인의 시녀 노릇을 하며, 그녀가 사기꾼의 유혹에 넘어가도록 부드럽게 격려하는 것이다. 박찬욱의 각색한 이 이야기는 20세기 초 일제강점기 한국으로 옮겨진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이성애를 근원으로 하는 기대와 문화적인 어떤 것들을 거역한다.
완벽하고 차분한 예술 연출과 반찬욱 감독의 이전 작품성의 결합으로 영화는 성공했다. <아가씨>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냉정하고 관능적인 감성, 그리고 주인공들이 저항하는 어떤 것에 있다. 세심하게 만들어진 장면들 중, 화려한 도서관에서 응접실을 배경으로 정성들여 만들어 진 구두와 장갑, 실크 드레스를 입은 나른한 아가씨 히데코는 중얼거린다. "여기는 햇빛이 비치지 않아."
이 영화에서 가장 감정적으로 충만한 시퀀스는 목초지의 목가적 따뜻한 감성과는 배치되는 마모된 벽돌벽과 잔잔한 강물 위의 보트 장면이다. <하녀>에서 일본 귀족 중 한명이 "일본은 아름답고, 한국은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일본 귀족에게 있어서 일본이란 인류 문명화의 절정을 상징하고, 한국은 열등한 식민지이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의 연출은 교양인의 미적인 오브젝트들 책, 인형, 목걸이 등 인류 업적의 절정으로 상징될 수도 있는 이런 오브젝트들이 되려 잔혹함의 도구로서 재설계될 수 있다는 것을 통해 일본 귀족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교묘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방금 언급한 말은 내가 <아가씨>를 크게 애정하는 이유 중 아주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 영화는 감각적인 심리 스릴러로 선전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또한 상처받은 개인과 서로에게서 찾을 수 있는 구원에 대한 깊고 진실된 온정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들이 서로 교차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김민희와 김태리의 관계는 처음에는 철이 없다가도, 서로에게 정직해지며, 결국에는 서로에게서 헤어나오지 못 하게 된다. 이 점을 당신은 서서히 깨닫게 된다. 김태리는 특히, 로맨틱 코미디 장면에서 자주 보이는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잘 연기한다. 김태리의 그런 연기는 신선한 공기와도 같다. 특히 이 영화 속 거대한 집의 억압적인 분위기를 감안할 때 더욱 그렇다.
확실히, <아가씨>는 뒤틀림, 성애물, 힘과 통제에 관한 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폭넓은 성관계 묘사는 남성들의 자극이 되기엔 상당히 냉정하고 기계적이지만, 주인공 간 성관계 묘사는 다정하고 생기 넘치고, 또한 진짜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완벽한 로맨틱한 영화다. 단순히 정형화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로맨스다. 나는 영화의 절정에 울었고, 내 눈물은 걷잡을 수 없고 카타르시스를 띠고 있었다. 이 영화가 상연되기 전에 했던 영화와 관련된 조사들 때문에 나는 이 영화가 내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닿으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 영화는 여러분이 마치 빛을 향해 당신을 부드럽게 올려주는 삶을 살아온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 주는 그런 희귀하고 멋진 영화다. 동성애 영화든 아니든 간에 묘사의 의의란 바로 이런 것을 뜻한다.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존재 이유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박찬욱 감독은 자신이 여성 주도의 음모 장르에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전작 <스토커>처럼 <아가씨>에서도 여성간 권력 역학 관계를 다루게 되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가 핵심적으로 등장한다. 여성이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이끌어가는 영화들이 상당수)
끈적끈적한 막대사탕 빛처럼 영화에 스며드는 에로티즘을 넘어 박찬욱 감독은 식민지 정치에 눈독을 들였다. <아가씨>에서의 성정치 관련 장면이 실제 성관계 장면보다 더 복잡하고 매력적으로 변하는 것은 분명 여기에 있다. 남성이 전유한 힘을 빼앗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친 일본과 한국 여성들의 성적, 정서적 단결은 결국 로맨스 플롯이 가장 큰 의미를 갖는 부분이다. 워터스의 이야기를 각색한 <아가씨>는 서로 다른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 여성들이 모여 근본적으로 남성의 전유물이라 여겨지는 타락한 식민지 시대상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는 이야기다.
영국 작가가 쓴 이야기의 영국 문화에 집착하는 캐릭터를 기본으로 하여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한 찬욱의 영화는 엄격한 사회적 관습과 억압된 성에 의해 정의되는 영국 영화와 문학을 침착하게 일깨운다. 그래서 영화가 상식을 벗어나갈 때, 레즈비언의 사랑 문제가 휘몰아칠 때, 성도착적적인 북클럽과 그리고 정신병원으로부터 탈출했을 때 그리고 이 줄거리에 소개된 모든 인물들이 비틀렸을 때 <아가씨>는 우리에게 체제 전복적인 스릴을 준다. (중략)
지금 시점에서 그의 커리어를 살펴보면, 박찬욱은 그 어떤 잘못된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어느 누구도 박찬욱 같은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스타일리쉬하고, 야하고, 독창적이고, 충격적이고, 재미있고, 폭력적인 영화를 동시에 만들 수 없다. <올드보이>나 저평가된 <스토커>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아가씨>는 당신에게 이 놀라운 재능에 대해 확신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부정적 리뷰(Rotten)
무성한 의상 드라마로 시작됐던 드라마는 곧 음모와 동맹의 전환, 뒤틀린 복수극으로 변하는데, 이는 누구를 믿어야 할지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누구를 좋아해야 할지 절묘한 긴장감에 휩싸이게 하는 방식으로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점을 변화시킨다. 이 점은 분명히 맛있고, 재밌다. 그러나 <아가씨>에는 큰 문제가 하나 있어서 거의 입맛을 버렸다.
성차별주의는 <핸드메이드>의 문화적 논평의 핵심 요소인데, 사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 이야기의 중심은 여성들이 그들을 성적으로 심리적으로 이용하고 학대했던 남성에 대항하여 교활하게 반발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박찬욱 감독의 그들에 대한 묘사는 그들을 대상화했고, 모욕적이며 여성의 관점에서 성을 실제로 탐구하는 것보다는 남성을 위한 동성애 소프트코어 포르노를 만드는 데 관심이 더 많아 보인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처럼 <아가씨>는 영화 대부분을 어떻게 하면 남성의 흥미를 끌지에 대해서만 신경쓰는 레즈비언 로맨스다.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이 영화가 주인공과 주인공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깎아내리기 때문이다. <아가씨>의 하위 줄거리는 히데코의 삼촌이 남자 손님들을 위해 히데코에게 어떤 종류의 성적 흥분을 강요해왔는지, 그녀에게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경험인지, 그리고 그녀의 삼촌과 손님들이 그 강요된 연기를 즐기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에 관한 내용이다. 박찬욱 감독은 그의 여성 캐릭터에게도 아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영화 감독과 관객들은 악당으로 캐스팅 된 셈이다. (해석하자면, 여성을 관음하며 여성을 괴롭히는 악당 역할을 비판하면서도 그런 역할을 감독과 관객이 하고 있음을 꼬집은 것)
박찬욱 감독이 영화 속에서 이러한 아이러니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알 수 없다.(사실 그럴린 없다.) 감독이 영화 속 두 여성이 서로가 느끼는 기쁨으로부터 남성을 확실하게 배제하는 그 관계에서 침입자로서 그의 시선이 분명 환영받지 못할 것이란 걸 알지 못한다고 보기 어렵다. 남성 영화제작자들이 여성은 남성을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여성혐오적 기대로부터 벗어난 방법으로 여성의 관점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남성 영화제작자들은 이런 스토리는 지양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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